작가 협업 - 바람의 기록

2023. 12. 7. 18:57활동 기록

10월 23일 - 30일 

시각예술기록자 김보람작가와 함께

 

 

해남에 오기 전, 송지면에서 선생님으로 부임 했던 이를 만났다. 그에게도 해남의 대부분은 산과 바다와 바람에 관한 기억이었다. 봄이면 달마산에 올랐다가 가파른 산을 줄을 잡고 내려왔다고 했다. 11월부터 4월까지 매서운 바닷바람이 불었고, 바람이 몰고 온 습기 때문에 옷이 덜 말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바닷물이 빠지는 때에는 육지에서 증도까지 걸어가 조개를 주웠다고 했다.

 

세시간 반을 달려 해남에 왔다. 새봄을 만나러 오는 길은 언제나 멀다. 그러나 새봄이 보여주는 것들은 언제나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바라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자기 생을 산다. 땅끝은 매끄럽지 않고 돌바위와 섬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다. 원래는 하나로 붙어있었을 땅들. 솟아오르거나 물이 차올라 그렇게 보일 뿐 그 속은 다 하나의 땅이다.

 

나는 해남의 바람과 돌을 기록하기로 했다. 며칠을 산으로 바다로 쫓아다녔다. 증도, 두륜산, 미황사, 두 개의 너덜지대. 산과 바다와 바람이 있는 곳으로.

 

기록1

∙두륜산 천년수(느티나무)의 바람

∙미황사 동백나무의 바람

∙달마고도 구실잣밤나무의 바람

 

바람은 무엇으로 기록해야 할까. 바닥에 종이를 두고 나뭇가지 끝에 연필을 매달아 내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람이 어떻게, 어느 강도로 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종이에 연필이 스칠 것이다.

 

바람을 기록하러 산으로 들어갔다. 세 곳 중, 첫번째는 두륜산의 천년수다. 가파른 산에 재료를 이고지고 올라갔다. 가는 길 내내 사람들이 쌓은 돌탑을 보았다. 마침내 만난 천년수는 단풍이 들었고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운동運動하고 있었다. 천년수와 그 옆의 나뭇가지에 목탄연필을 매달았다. 비탈진 땅에 앉아 오래 기다린 후에 기록물을 보러 갔다. 바람은 매번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바람은 손에 힘을 뺀 것보다 더 가벼운 선을 그렸고, 때때로 멈춰서 점을 찍었다.

 

 

이후 미황사 입구의 동백나무, 달마고도 1구간 중턱 구실잣밤나무가 있는 편평한 지대에서 바람을 기록했다. 가벼운 목탄이라 선이 연하게 그려졌다. 잉크였다면 더 둔탁한 선이 그려졌을 것이다. 바람이 멈췄다가 다시 불기 시작했을 때 지점을 찾아보라. 바람은 길게 불고, 짧게 여러 방향으로 불었다.

 

 

 

기록2

∙달마고도 두 개의 너덜지대

∙증도 : 굴껍데기가 가득 쌓인 바위섬

 

바위들은 석채에 물을 갠 안료를 바위에 묻혀 한지에 찍어내기로 했다. 석채는 돌가루를 갈아 만든 안료이다. 바위를 기록하는 데 알맞은 재료라고 생각했다. 너덜지대의 불그스름한 바위에 쓴 안료는 주사, 증도의 검푸른 바위에는 먹과 보라색 안료를 섞었다. 안료는 비가 오거나 파도치면 씻겨나갈 것이다.

 

미황사 입구를 지나 너덜지대로 향하는 길은 두륜산보다 수월했다. 너덜지대는 표면에 노출된 거대한 바위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쪼개져 각이 진 바위들이 굴러 떨어진 곳이다. 돌은 깨지거나 쪼개진다. 불규칙적으로 박살 나 깨지거나, 평탄한 면을 만들며 쪼개진다. 돌 위에 자란 지의류 와 퇴적된 것으로 보이는 가로 층, 다른 돌이 떨어졌거나 어떤 힘을 받아 세로로 금이 간 흔적의 탁본을 떴다.

 

 

증도는 너덜지대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다. 매일 물에 잠기고 파도친다. 그러면서 고둥, 보말, 굴이 와서 붙고 맨들맨들하게 다듬어진다. 물때는 매일 49분씩 느려진다. 첫날(10.22)에는 오전 11시, 일주일 뒤(10.29)에는 오후 3시 반, 물이 빠지기 시작할 쯤 섬에 걸어 들어갔다. 한시간이 지났을 때는 간조에 다다랐다. 물에 젖은 돌 위에 여러 생명이 들러붙어있었다. 너덜지대의 편평하고 시원하게 각이 진 생김새와는 전혀 다르다.

 

 

 

바람과 돌은 각각 다른 방법으로 기록되었다. 두륜산 천년수의 나뭇가지 2곳, 미황사 동백나무의 나뭇가지 2곳, 달마고도 구실잣밤나무의 나뭇가지 2군데 총 6곳에서 바람을 기록했다. 너덜지대에서는 바위 50개, 증도에서는 35개의 탁본을 떴다.

 

바람은 큰 가지가 몇 개의 작은 가지로 갈라지고, 작은가지가 더 작은 가지로 갈라진다. 돌 역시 큰 바위에 파도가 쳐 돌이 떨어져 나가고, 그 돌이 또 어떤 힘을 받아 더 작게 쪼개진다. 복잡하게만 보이는 자연에는 단순하고 명쾌한 질서가 있다. 그러면서도 불규칙하고 거침없는 운동運動을 반복하면서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살아있기 때문이다.